초원 위의 준마

아무것도 아닌... | 2006-10-01 11:20
3,867
나는 매우 수줍은 아이였다.
남앞에 나서는것에 늘 공포감이 있었고 드러나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4학년부터 남녀반으로 나뉘었던 당시 국민학교는 요즘하고는 천양지차이가 날만큼 달랐다.
그시대 분위기가 그렇듯, 선생님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때도  부모마음은 다르지 않아서
과외공부로 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까지 두는 치맛바람은 사회문제가 될만큼 거셌지만
감히 선생의 권위앞에선 어떤 불평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여선생 숫자도 적었던 그때는 남자반에 체벌용 몽둥이가 몇개씩 갖춰져 있는것은 물론이고
원산폭격이니 뭐니 해가며 아이들에게 군대식 기합도 다반사였다.

시험을 앞둔 어느날 다른반과의 성적경쟁을 염두에두고 교사가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따분한 나는 혼자 공책에 그림을 그리면서 딴청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무엇을 그렸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푸욱 빠져있는데,옆에 누가 섰는 기척을 느꼈을때는 이미 늦었다.
억굴색이 이미 변한채 몽둥이를 한손에 든 선생이 위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거냐...임마...!"
이거 된통 걸렸구나 싶었다.

고함소리에 따라 교탁쪽으로 가면서, 이제 맞을일만 남았구나....했는데
그선생은 의외로 몇마디 훈계를 하고나서는
"지금부터 칠판에다 네가 가장 그리고 싶은것을 그려봐라. 잘그리면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은 매 타작 이란것쯤은 애들도 다 안다.
남앞에 나서는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인 아이는,차라리 매를 맞고 끝나는게 속편하겠다 싶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분필을 받아들고 선생님이 깨끗이 지워주는 칠판에다 서슴없이 그림을 그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내가 쭉쭉 그려나간것은 크고 잘생긴 말 한마리 였다.

다 그려놓고 뒤돌아서자  당시 아이들이 칠팔십명 이나 되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위협의 당사자인 선생님은 다가와 내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면서,뭐에 놀랐는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이해못할 눈빛이 지금도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들어가거라...." 하면서 고개를 꺄웃둥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아이는 속으로 되뇌었다.
" 이런것이 승리라는건가..............? "

어릴때 부터 나는 말이 좋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조금 나간 서대문밖 영천에서 자란 나는 광화문쪽으로 자주 놀러다녔는데
그시절엔 기마 경찰들이 거리를 곧잘 왔다 갔다 했다.
그 늘씬하고 미끈하게 잘 생긴말을 볼때마다 아름다움이란 바로 저런것을 두고 말하는건가 보다...하면서
홀딱 반해서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던 꼬마였다.
지금은 말을 직접 볼기회가 거의 없지만,
어쩌다 화면으로나마 말의 균형미를 보게될때면 내 어릴때 기억들이 되살아나곤한다.

어제로 4강을 결정짓고 종착점에 가까이 온  택견배틀판에 열기가 달아오른다.
거기다 오뉴월 팥죽같이 끓어오르는 미디어의 힘까지 덧입은 인사동 작은마당은 사람들로 빽빽한데
그 첫경기에서 나는 또 한마리의 말을 보았다.

성대명륜팀을 이끄는 막강한 쌍두마차가 이기범군 과 김성복군 이라면,다크호스 역활은 김근찬군 이다.
그중에서 어제 내눈을 사로잡아 버린건
택견이 벌어지는 매트 위에서는 광활한 만주의 파란초원 위에 준마처럼 내달리면서도,
평소때 움직임은 늘 묵묵해 뵈는 김성복 선수다.
그에겐 기회가 왔을때 놓치지 않고,  위기에 처했을때 섵불리 서두르지도 않는 든든함이 있다.
그만큼 여유와 자기택견에 대한 믿음처럼, 무언가 품은게 있다는말이 되겠는데,
어제는 좀 달랐다
성복군은 어제, 한선수 한선수를 대하는 집중력에서나  그동안 보여왔던 선굵은 택견의 전형보다는
상대가 움직일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서, 가차없이 그헛점을 공격하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습공격이 화려했던 성복군의 경기는 기억에 별로 없는데
어제 용인대팀의 마지막선수로 나온,
그의 별명처럼 얼굴이 동그란 호떡 모양새인 아무개선수가 차올리는 발질의 방향을 미리 예측하고서,
그 반대축 다리를 차서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정확하고 눈부신 기술은
흔히 볼수없는 택견의 묘미 였다.

옛날 중국에서는 가을을 천고마비 의 계절 이라고들 했다.
하늘은 높고  북쪽 넓은초원에 뛰노는 말들이,
여름내 맛있는풀을 먹고 잘 자라나 한껏 힘을 비축할때 쯤이면
그 말들을 타고 몰려 내려올 북방의 기마민족들에 대해서,  중원의 중국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감과 경계심 을 말하는것이고
그들에게 잠재 되어있는 지울수없는 위협과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내가 택견실력 이외에 인간적 감성도 엿뵈는듯하지만 ,그 표현능력은 왠지 매끄럽지 못할것만 같은
김성복군을 보면서
저기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위에 자알 생긴 준마 한필을 떠올렸듯이,
이 가을에 그옛날 우리조상들이 수천년에 걸쳐서 살았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저 북쪽 끝간데 없이 드넓은 초원 위에 한마리 멋진 갈색말이 되어,
마지막 배틀까지 마음껏 내달리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넘치는 힘과 함께
택견행위속에 담긴, 사람과 사람사이에 주고 받아야할 속 깊은 정감들을 체득하고
자기 일상속에서도 드러낼줄아는, 한 택견꾼 젊은사내의 아름다운 질주를 기대하고있다.

티케베를
감히 이공대생으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문장력입니다... 정말 감동~~~ ^^

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감동
전 글에 감동 받아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

택돌
멋진 글!!

흠..
초원위의 준마라.. 멋진 표현이네요. 김성복선수 어제 멋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