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우리무예 택견을 보고 좀 이해안되는게 있어서...
검불 | 2007-05-28 01:533,518
본문
전근대시대 특수신분층의 하나.
보통 일정한 직업 없이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며 협기 있고 호걸스럽게 노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조선 초기에는 관직을 가졌던 자로서 향촌에 거주하는 유력계층을 의미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벼슬을 못하고 직역(職役)이 없는 사람을, 조선 후기에는 아직 벼슬하지 못한 무인 또는 무과응시자를 의미했다.
한량은 지방의 유력자층으로서, 비록 형식적이나마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여 중의(衆議)를 대표하는 계층의 하나였다. 재산과 학력을 갖추고 유향소(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사회를 주도했으며,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한량은 호적과 군적(軍籍)에 누락되어 직역이나 역역(力役) 부담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족자제(士族子弟)나 부유한 양인자제로서 군역을 기피하여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반면, 무예를 익혀 무사 또는 무과응시자로 관념화한 무인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1625년(인조 3) 〈호패사목〉에서 소속처가 없는 사족이나 평민,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유생으로 규정되기도 했으나, 1696년(숙종 22) 최석정(崔錫鼎)의 건의에 따라 양반 가운데 무(武)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었다. 정조 때의 〈무과방목〉에서는 무과합격자로 전직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국가는 한량에 대해 조선 초기부터 역을 부과하려고 노력했다. 1430년(세종 12)에 한량에게 군역을 지우게 한 계문(啓文)이 보이며, 세조 때는 하삼도 지방의 한량 2,187명을 추쇄하여 호익위(虎翼衛)라는 특별부대를, 중종 때는 정로위(定虜衛)를 조직했다. 임진왜란 이후 양역확보를 위해 한량에게도 군역을 지우려는 정책이 적극 추진되었다. 1653년(효종 4) 김시진(金始振)은 한량이 군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신분임을 강조했으며, 또 한량을 양역에 충당하라는 원칙이 확정되었다. 이에 한량들은 역의 부담이 적은 군관(軍官)이나 각 관청이 제위(諸衛)에 투속하여 군역의 의무를 피했다. 이후부터 한량은 벼슬하기 이전의 무인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벼슬하기 이전의 문인(文人)을 의미하는 유학(幼學)과 대비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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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무예
양반이라는 명칭의 본뜻부터 먼저 이해를 하시는게 빠를 것 같은데요..
양반이라고 해서 벼슬을 꼭 해야만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족보 아시죠..? 어디 이씨, 무슨 박씨, 무슨 김씨, 몇대손 하는 그런 족보말이죠.. 그걸 가지고 있으면 양반으로 통칭한거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나 구한말에도 그런일들이 비일비재했지만, 돈 많은 천인들이 양반의 족보를 사서 그 이름으로 행세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는 성씨가 본디 성이 아닌 경우도 있을수 있다는 확률이 나오지요..
어째 이야기가 점~점 멀어지는데요..
어쨌든.. 한량이라는 신분도 돈 많은 지주 계급 즉, 족보를 가지고 있는 양반 계층으로 해석하시어 양반춤이나 한량춤이나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양반이라고 해서 벼슬을 꼭 해야만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족보 아시죠..? 어디 이씨, 무슨 박씨, 무슨 김씨, 몇대손 하는 그런 족보말이죠.. 그걸 가지고 있으면 양반으로 통칭한거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나 구한말에도 그런일들이 비일비재했지만, 돈 많은 천인들이 양반의 족보를 사서 그 이름으로 행세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는 성씨가 본디 성이 아닌 경우도 있을수 있다는 확률이 나오지요..
어째 이야기가 점~점 멀어지는데요..
어쨌든.. 한량이라는 신분도 돈 많은 지주 계급 즉, 족보를 가지고 있는 양반 계층으로 해석하시어 양반춤이나 한량춤이나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검불
검색에 한량춤이라고 있는데
괄호로 양반춤이라고 되있군요.
괄호로 양반춤이라고 되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