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날의 별미
아무것도 아닌 | 2007-07-08 13:495,604
뜨거운 여름날을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있겠지만
어제같이 장마철중에 사나흘 갠날의 무더위속 끈적거림은, 높은 습도탓에 어쩔수 없으나
사람들을 쉬이 지치게 하고 괜히 짜증을 유발케한다.
어제 배틀장에 모인사람들의 장내정리할때 느적느적한 반응에는 아마 계절탓도 있을것같다.
어제 두번째 경기에서 맞붙은 서울대팀과 경기연맹팀은 좀 색다른데가 있다.
소위 무예의 "무"자도 모르는 나같은사람도 아주 어릴때 "수밝기" 라는 전통무예가 있다는 풍문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데
바로 서울대팀이 요새는 동이택견으로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는 그곳 소속 이란다.
재작년 서울대팀이 택견배틀에 처음 나왔을때
그들이 시합에서 펼쳐보이려는 무술이나,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분위기가 결련쪽과는 사뭇 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동이라는 명칭이 옛날 중국쪽에서 천자의 나라 바깥, 동쪽에 자리한 오랑캐 라는 의미로
낮춰서 우리를 부르던 그 東夷 인지,
아니면 다른 한자를 쓰는것인지. 과연 어떤의미에서 동이라는 이름을 쓰는건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경기연맹팀은 한국에서 가장 큰 택견단체인 대한택견 소속으로서 택견배틀에 참가하고있다.
아마 쉽지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결련택견을 통로 로 택견을 접해온 내게, 대택쪽의 택견은 도대체 어떤 모양새일까 궁금해서
작년에 딱 한번 대한택견이 주관하는 경기를 일부러 찾아가서 본적이 있다.
가서 보니 그쪽의 경기와 평가방식은 같은택견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해도 내가 몇년째 쭉 봐온 결택쪽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물론 나처럼 어디에도 소속 되지않은 일반인의 시각으로
전통보존 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이제 현대스포츠 영역에까지 진입을 넘보는 모습속에서
대한택견쪽의 참 좋은점과, 아쉽게도 이런쪽은 개선하는게 어떨까..싶은 문제점들이 한눈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로운 일반인이라도
어떤 대상에 대해서 짧은 코멘트 라도 한번 할라치면, 그 세계의 전체적인면과 디테일한 면을
두루 훑어볼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런다음에 순수한 애정을 밑바탕에 깔고있는 경우, 뭔말을 하는게 옳지 않을까 싶고
나는 아직 그런 여견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삼가하는게 마땅하다.
어쨌든
택견배틀은 결련택견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아무리 택견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해도 각단체의 경기룰이 다르다면
어느 특정 대회룰에 따른성적이 선수들의 기량을 그대로 말해주는것이 될수는 없을것이다.
씨름이 그다지 좋은 예가 될수는 없겠지만
샅바를 잡고서 경기를 하는 한국씨름 방식으로 일본 스모선수와 대결을 할경우, 한국선수가 백프로 이기고
맨몸으로 하는 일본 스모방식으로는, 한국선수가 백프로 지는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결련택견에서 썩 잘하는 몇몇선수들이 대한택견 방식의 경기에 출전한다면, 역시 그리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택견배틀에 참가하고 있는 서울대와 경기연맹팀 입장에서 보자면,
제3의 택견이 될수밖에 없는 결련택견 방식으로 시합을 해본다는건 꽤 색다른맛이 될것같다.
그들에게 누가 이겼느니, 혹은 졌느니 따위는 부차적 일뿐
자신들이 늘 해왔을 효과적인 공격법이 손쉽게 안 통하는 경기룰속에서 대결을 경험한다는것 자체에
어떤 짜릿함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코엑스전시장에서 요즘 인기있는 k1 경기 시범을 본적이 있다.
프라이드 경기에서 인기있는 김민수 선수를 비롯한 격투기 선수들이 재미있게 시범을 보인다음에
관중들에게 혹시 이선수들에게 맞아보거나 (?) 때려 보고 싶은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개들 망설일것으로 생각했으나 의외로 선듯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맞겠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고, 모두 다 때려보겠다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어느 젊은 직장인이 나오더니만
자기는 펀치를 몇번 날려본 뒤에 선수들에게 엠바공격을 한번 당하고 싶다고 했다.
혹시 다칠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묻자, 그 젊은이는 "그정도는 아니고 살짝, 아주 살짝 맛만 보여달라고 했다.
도대체 엠바 공격을 받을때의 느낌이 어떤것인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수가 한순간에 엠바공격을 하자 이 직장인은 "어? 안 아프네요." 하는순간 바로 선수가 힘을 넣으니
"아.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관중들이 폭소를 터트렸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이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색다른것을 경험하고픈 충동과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다.
더구나 무예를 하는 젊은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타 단체선수들과 겨뤄본다는 쾌감이 없을수 있으랴.
그리고 자기들이 불리한줄을 뻔히 알면서도 택견인 이란 이름으로 이 배틀에 참가한
대택이나 동이택견. 전통택견.그리고 증평쪽 선수들의 올곧은 무예인의 자세를 생각해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의 속마음이야 함부러 짐작할수 없지만.
일단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지기 앞서서 택견을 하고 있다는 공통분모에 주목하는 자세를 보여주고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이 될수있으리라.
제 아무리 주장이 다르고, 단체간 소통부족 속에 공감대를 형성 하지못한 택견 커뮤니티 라지만
우선 이 정도 로도 기본택견 틀 안에서 각 단체들이 경쟁은 하되, 서로를 보듬는 모습...쯤으로 보아도 될만 하니
후덥지근한 이 여름날
시원한 얼음 알갱이 둥둥 떠다니는 콩국수 한그릇을 별미로 먹는 맛처럼 말이다.
한율
우리민족이 동이족이라고 불리운 이유는 동쪽의 오랑케라고 낮춰 부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우리민족이 오래동안 다루어온 활에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른분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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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국가들에 의하여 표기된 우리민족의 가장 오랜 국호는 조선(朝鮮:쥬신)이었으며, 쥬신 역사의 시작은 중국사의 기록상으로는 거이 일만년에 가까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에서 가장 중시해야할 부분인 고구려사 내용에서 弓에 대한 내용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주기 위하여, 군사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하였나에 대한 고증을, 수많은 외침을 물리친 전략무기인 활이란 말에서 보듯. 활은 문자가 아닌 언어라는 사실이며, 이러한 언어의 사용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일 만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 과 살의 뜻은 궁시(弓矢)를 의미하며, 활살의 말 뿌리는 우랄알타이 계통의 퉁구스 말에서 유래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활은「하리」→「할」→활로 변천되었고, 살은 「시란」→살 인 점에 미루어, 고대 쥬신(朝鮮) 계열 민족이 남하하면서 전래되어 내려온 말로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언어라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조상의 역사에 대한 전설에 대한 내용을 적은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9000여 년전, 동이족(東夷族)인 한인(桓因)씨가 파미르 고원 아래에 환국(桓國)을 세우고, 후에, 그 중심을 바이칼 호 근처로 옮겼다.
우리 조상은 파내류(波奈留) 산(파미르 고원)으로부터 사백력(斯百力:시베리아)으로 옮겨 왔다가, 서기전 7000년 경에는 바이칼 호에 이르렀고, 이때 세 갈래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이중 아침에 해가 뜨는 방향으로 이동한 민족을 쥬신족(朝鮮族)이라 하였고 이들은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민족의 영산 불함산(不咸山:지금의 백두산)을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즉 광명신(光明神)의 처소로 알아 그 곳에 자리잡고 이름을 아사달이라 하였다.
주) 나반(那般)→아바→아바이→아버지. 아만(阿曼)→아마→아마이→어머니 아사는, 새(New). 처음, 시작,의 뜻이고 달은, 땅,을 뜻한다. 따라서, 아사달은, 새땅, 혹은, 시작하는 땅, 이라는 뜻이다. 일본어의 아사(あさ:아침)는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 우리 민족이 퍼져 사는 온 누리를 쥬신이라 불렀는데, 쥬신은 이두문자로는 조선(朝鮮), 숙신(肅愼), 주신(州愼)이라고 쓴다.
동양의 역사는 처음부터 쥬신족(朝鮮族=東夷族)과 중화족(中華族=華山族, 華族)간의 패권 다툼이었다.
처음에는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절대 우세 속에서, 중화족은 파미르 공원 주위에 묶여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력을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시전(詩傳)에 따르면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떳떳하다, 편안하다라고 풀이하였고, 사기(史記)에는 상하다, 죽이다, 라고 쓰여 중국인들의 동이에 대한 감정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하늘이 열린 이래 장구한 세월을 동이족의 지배를 받아온 중화족은 동이를 대인(大人)으로 우러러보면서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으며,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케로 바꾸어 해석하다가, 나중에는 도둑이리는 뜻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동이(東夷)란, 글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동쪽의 큰 활을 사용하는 대인(大人)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가 중국의 유민들이 세운나라 라며 우리 한국사에 대한 패권주의적인 선언을 하고있지만, 쥬신의 이두(吏讀)식 한문 표기는 조선(朝鮮), 숙신(肅愼), 주리진(朱里眞), 주신(珠申) 등이다. 따라서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滿洲) 등의 민족 이름들은 모두 쥬신과 동일한 배달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조선(朝鮮)의 원래 우리식 발음은 쥬신이며 그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사는 온(전부, 모두) 누리(세상(世上)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를 뜻한다. 하였으며 환웅(桓雄), 배달님(檀君) 선조들께서 태백산(불함산, 백두산) 북쪽 아사달에서 일어나 만주 일대에 넓게 자리를 잡았다.
숙신(肅愼)도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그 발음은 여전히 쥬신이다.(현재 중국인들은 쑤우신 으로 발음하고 있다.
* 山海經 大荒北經 : 肅愼氏, 一名挹婁, 在不咸山北 (숙신(쥬신)의 또다른 이름은 읍루인데 불함산 북쪽에 있다.)
이외에도 쥬신을 비롯한 우리 민족을 뜻하는 여러 가지 이두식 표기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사서는 많지만 몇 가지 참고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진서 사이전(眞書 四夷傳), 후한서 읍루전(後漢書 挹婁傳), 위지 물길전(魏志 勿吉傳), 후당서 말갈전(後唐書 靺鞨傳),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청태조실록(淸太祖實錄)
옛 부족국가 시대에는 영고, 동맹, 무천 등의 하늘을 숭상하는 제례를 통하여 신에게 감사와 부족의 단합, 그리고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제례는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전사들의 온갖 경기가 행하여졌다. 여기에 부족간의 생존과 터전의 방어를 위한 준비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자연히 부족의 축제에는 제례의식을 통한 부족의 결집세력을 형성하면서 무예적 기능이 집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성한 세력의 중화족에 밀린 쥬신(朝鮮)세력 중, 일부가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적 체계를 갖추면서, 민족 고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적은 책으로 日本의 國家起原, 그리고 일본에서 출판된 日本書紀, 中國五千年史라는 책에 자세히 실려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군사력을 이룩한 배경은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로 제작되어진 고성능의 활과, 이를 다루는 우리만의 고유한 사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궁구를 만들고 다루는 기법도 수 천년 간 맥이 이어져오면서 천연 제질의 특성을 이용한 복합궁 형태를 계승발전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이 고래로부터 궁구를 제작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활을 다루는 기량 또한 특출하여 주위 여러 민족이 두려워하여, 우리의 궁은 이렇듯 조상의 얼과 슬기가 담긴 첨단무기 발명기술을 바탕으로 시대별로 외세에 의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의 이적은, 고구려의 역사가 당에 비할만 함을 시기하여 전부 불살라 버렸다(이덕 著 기년아현부)
또 송나라의 호종단이 고려에 거짓 귀화하여 예종, 인종 시대에 고관으로 등용되어 전국을 돌며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금석물을 전부 타도하였다.(동문선이)
궁은 이렇듯 조상의 얼과 슬기가 담긴 전통무예를 바탕으로 시대별로 독특한 발명품으로 군사력 역할을 다하였으며, 중국의 사서에 표기된 우리의 활에 대한 명칭도, 초기에는 환궁(桓弓)으로 시작하여 맥궁(貊弓), 낙랑궁으로 표기되었다가 고구려 시대의 각궁, 신라의 노(弩), 고려의 편전(片箭), 조선의 신기전(神機箭)은 당시로서는 하이테크적인 최신 병기였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궁술은 한민족의 필수 호국무예였으나 화약무기인 총기와 화기의 출현으로 활은 무기로서의 가치상실과 함께 호국무기로서는 이선으로 물러났으나, 궁술은 심신을 위한다
궁술장이 있는 곳은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형 정(亭)이었으며 이중 가장 큰 규모의 정은 모정이라 하였고, 모정이 있는 곳은 OO대(臺)라는 군사들의 주둔지가 있었다.
궁술을 통하여 심신단련 및 장부(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한 예와 법을 정립하였고 궁에 대한 기술과 예절을 사법(射法)과 사풍(射風)이라하여 종래의 궁술이나 射術이라는 차원에서 한 차원 높이 다루어 궁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의 선배제도는 백제의 무사, 신라의 화랑도처럼 청소년기에 집단 생활교육을 통하여 인격연마와 함께 무예를 단련하며 도와 덕을 닦았으며, 영웅적 감동을 준 인재들이 육성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육기관으로 태학과 함께 경당을 설치하여 청소년들에게 궁술, 기마술, 검술과 같은 무술 연마와 함께 병법을 가르쳤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양만춘, 연개소문, 을지문덕, 우유, 밀우 등, 많은 영웅적 선조들의 기상은 민족의 웅걸찬 모습을 나타낸다.
이 당시 건축되어진 여러 유적에서 무예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데 무용총의 벽화에서 수렵도를 비롯하여 격투무예 (권법)와, 씨름, 삼실총의 천정을 받쳐들고 있는 역사의 모습, 갑주의 환두대도를 허리에 차고 창을 집고 선 장수, 무장한 기마 무사들이 창을 겨누면서 ㅉㅗㅈ고 ㅉㅗㅈ기는 그림과 축제에서 칼을 던져 받는 모습 등은 완성된 다양한 무예 풍습과 패기찬 기상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예 연마를 통한 호연의 기상과 무사적 덕목을 가르쳤음이, 고대의 여러 문헌과 유물등 자료와 풍습에서 증명되고 있다.
당나라가 탐을 낸 신라의 궁노장 구진천은 일명 천보노를 만드는 장인으로서 겨레의 과학적인 무예문화의 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음과 함께 멀리 유럽으로까지 전래된 석궁이라는 신무기로 등장은 경의적인 사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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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국가들에 의하여 표기된 우리민족의 가장 오랜 국호는 조선(朝鮮:쥬신)이었으며, 쥬신 역사의 시작은 중국사의 기록상으로는 거이 일만년에 가까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에서 가장 중시해야할 부분인 고구려사 내용에서 弓에 대한 내용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주기 위하여, 군사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하였나에 대한 고증을, 수많은 외침을 물리친 전략무기인 활이란 말에서 보듯. 활은 문자가 아닌 언어라는 사실이며, 이러한 언어의 사용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일 만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 과 살의 뜻은 궁시(弓矢)를 의미하며, 활살의 말 뿌리는 우랄알타이 계통의 퉁구스 말에서 유래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활은「하리」→「할」→활로 변천되었고, 살은 「시란」→살 인 점에 미루어, 고대 쥬신(朝鮮) 계열 민족이 남하하면서 전래되어 내려온 말로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언어라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조상의 역사에 대한 전설에 대한 내용을 적은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9000여 년전, 동이족(東夷族)인 한인(桓因)씨가 파미르 고원 아래에 환국(桓國)을 세우고, 후에, 그 중심을 바이칼 호 근처로 옮겼다.
우리 조상은 파내류(波奈留) 산(파미르 고원)으로부터 사백력(斯百力:시베리아)으로 옮겨 왔다가, 서기전 7000년 경에는 바이칼 호에 이르렀고, 이때 세 갈래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이중 아침에 해가 뜨는 방향으로 이동한 민족을 쥬신족(朝鮮族)이라 하였고 이들은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민족의 영산 불함산(不咸山:지금의 백두산)을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즉 광명신(光明神)의 처소로 알아 그 곳에 자리잡고 이름을 아사달이라 하였다.
주) 나반(那般)→아바→아바이→아버지. 아만(阿曼)→아마→아마이→어머니 아사는, 새(New). 처음, 시작,의 뜻이고 달은, 땅,을 뜻한다. 따라서, 아사달은, 새땅, 혹은, 시작하는 땅, 이라는 뜻이다. 일본어의 아사(あさ:아침)는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 우리 민족이 퍼져 사는 온 누리를 쥬신이라 불렀는데, 쥬신은 이두문자로는 조선(朝鮮), 숙신(肅愼), 주신(州愼)이라고 쓴다.
동양의 역사는 처음부터 쥬신족(朝鮮族=東夷族)과 중화족(中華族=華山族, 華族)간의 패권 다툼이었다.
처음에는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절대 우세 속에서, 중화족은 파미르 공원 주위에 묶여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력을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시전(詩傳)에 따르면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떳떳하다, 편안하다라고 풀이하였고, 사기(史記)에는 상하다, 죽이다, 라고 쓰여 중국인들의 동이에 대한 감정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하늘이 열린 이래 장구한 세월을 동이족의 지배를 받아온 중화족은 동이를 대인(大人)으로 우러러보면서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으며,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케로 바꾸어 해석하다가, 나중에는 도둑이리는 뜻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동이(東夷)란, 글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동쪽의 큰 활을 사용하는 대인(大人)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가 중국의 유민들이 세운나라 라며 우리 한국사에 대한 패권주의적인 선언을 하고있지만, 쥬신의 이두(吏讀)식 한문 표기는 조선(朝鮮), 숙신(肅愼), 주리진(朱里眞), 주신(珠申) 등이다. 따라서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滿洲) 등의 민족 이름들은 모두 쥬신과 동일한 배달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조선(朝鮮)의 원래 우리식 발음은 쥬신이며 그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사는 온(전부, 모두) 누리(세상(世上)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를 뜻한다. 하였으며 환웅(桓雄), 배달님(檀君) 선조들께서 태백산(불함산, 백두산) 북쪽 아사달에서 일어나 만주 일대에 넓게 자리를 잡았다.
숙신(肅愼)도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그 발음은 여전히 쥬신이다.(현재 중국인들은 쑤우신 으로 발음하고 있다.
* 山海經 大荒北經 : 肅愼氏, 一名挹婁, 在不咸山北 (숙신(쥬신)의 또다른 이름은 읍루인데 불함산 북쪽에 있다.)
이외에도 쥬신을 비롯한 우리 민족을 뜻하는 여러 가지 이두식 표기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사서는 많지만 몇 가지 참고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진서 사이전(眞書 四夷傳), 후한서 읍루전(後漢書 挹婁傳), 위지 물길전(魏志 勿吉傳), 후당서 말갈전(後唐書 靺鞨傳),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청태조실록(淸太祖實錄)
옛 부족국가 시대에는 영고, 동맹, 무천 등의 하늘을 숭상하는 제례를 통하여 신에게 감사와 부족의 단합, 그리고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제례는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전사들의 온갖 경기가 행하여졌다. 여기에 부족간의 생존과 터전의 방어를 위한 준비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자연히 부족의 축제에는 제례의식을 통한 부족의 결집세력을 형성하면서 무예적 기능이 집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성한 세력의 중화족에 밀린 쥬신(朝鮮)세력 중, 일부가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적 체계를 갖추면서, 민족 고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적은 책으로 日本의 國家起原, 그리고 일본에서 출판된 日本書紀, 中國五千年史라는 책에 자세히 실려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군사력을 이룩한 배경은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로 제작되어진 고성능의 활과, 이를 다루는 우리만의 고유한 사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궁구를 만들고 다루는 기법도 수 천년 간 맥이 이어져오면서 천연 제질의 특성을 이용한 복합궁 형태를 계승발전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이 고래로부터 궁구를 제작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활을 다루는 기량 또한 특출하여 주위 여러 민족이 두려워하여, 우리의 궁은 이렇듯 조상의 얼과 슬기가 담긴 첨단무기 발명기술을 바탕으로 시대별로 외세에 의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의 이적은, 고구려의 역사가 당에 비할만 함을 시기하여 전부 불살라 버렸다(이덕 著 기년아현부)
또 송나라의 호종단이 고려에 거짓 귀화하여 예종, 인종 시대에 고관으로 등용되어 전국을 돌며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금석물을 전부 타도하였다.(동문선이)
궁은 이렇듯 조상의 얼과 슬기가 담긴 전통무예를 바탕으로 시대별로 독특한 발명품으로 군사력 역할을 다하였으며, 중국의 사서에 표기된 우리의 활에 대한 명칭도, 초기에는 환궁(桓弓)으로 시작하여 맥궁(貊弓), 낙랑궁으로 표기되었다가 고구려 시대의 각궁, 신라의 노(弩), 고려의 편전(片箭), 조선의 신기전(神機箭)은 당시로서는 하이테크적인 최신 병기였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궁술은 한민족의 필수 호국무예였으나 화약무기인 총기와 화기의 출현으로 활은 무기로서의 가치상실과 함께 호국무기로서는 이선으로 물러났으나, 궁술은 심신을 위한다
궁술장이 있는 곳은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형 정(亭)이었으며 이중 가장 큰 규모의 정은 모정이라 하였고, 모정이 있는 곳은 OO대(臺)라는 군사들의 주둔지가 있었다.
궁술을 통하여 심신단련 및 장부(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한 예와 법을 정립하였고 궁에 대한 기술과 예절을 사법(射法)과 사풍(射風)이라하여 종래의 궁술이나 射術이라는 차원에서 한 차원 높이 다루어 궁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의 선배제도는 백제의 무사, 신라의 화랑도처럼 청소년기에 집단 생활교육을 통하여 인격연마와 함께 무예를 단련하며 도와 덕을 닦았으며, 영웅적 감동을 준 인재들이 육성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육기관으로 태학과 함께 경당을 설치하여 청소년들에게 궁술, 기마술, 검술과 같은 무술 연마와 함께 병법을 가르쳤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양만춘, 연개소문, 을지문덕, 우유, 밀우 등, 많은 영웅적 선조들의 기상은 민족의 웅걸찬 모습을 나타낸다.
이 당시 건축되어진 여러 유적에서 무예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데 무용총의 벽화에서 수렵도를 비롯하여 격투무예 (권법)와, 씨름, 삼실총의 천정을 받쳐들고 있는 역사의 모습, 갑주의 환두대도를 허리에 차고 창을 집고 선 장수, 무장한 기마 무사들이 창을 겨누면서 ㅉㅗㅈ고 ㅉㅗㅈ기는 그림과 축제에서 칼을 던져 받는 모습 등은 완성된 다양한 무예 풍습과 패기찬 기상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예 연마를 통한 호연의 기상과 무사적 덕목을 가르쳤음이, 고대의 여러 문헌과 유물등 자료와 풍습에서 증명되고 있다.
당나라가 탐을 낸 신라의 궁노장 구진천은 일명 천보노를 만드는 장인으로서 겨레의 과학적인 무예문화의 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음과 함께 멀리 유럽으로까지 전래된 석궁이라는 신무기로 등장은 경의적인 사실이라 하겠다.
하백루
재밌게 읽은 글이였어요.
그럼 지금 글을 쓰신분은 택견을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이신가요?
아니면 다른 무술을 하신??
그럼 지금 글을 쓰신분은 택견을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이신가요?
아니면 다른 무술을 하신??
우리옛법
참으로 간만에 읽게 되는 멋진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