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대택에 올라온 고등학생의 반론
태백산맥 | 2008-09-22 17:423,786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발탁되어 월급80원(당시 쌀 한 가마니는 7원 70전)을 받고 선수생활을 하기도 하셨다.
>23세 때 군을 제대하고 26세까지 축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평양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한 경력도 가지고 계셨다.>>>
>1907년에 군대해산이 되었는데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는 이상한 군대 문제는 뒤로 미루고
17세때 결혼하시고 곧 군에 입대하셨다고 했는데 아마 1908년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때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군 근위보병대 2연대 2대대를 주축으로
4개 중대로 구성한(총 병력 644명-근위기병대 포함) 새로운 부대를 구성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이후, 조선보병대, 조선기병대로 명칭이 격하되고, 조선기병대는 1913년 해
산됩니다. 송옹께서는 1915년까지 군에 계셨으니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신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축구문제를 따져보자.
>
>'조선불교축구단'이란 1925년 4월 불교청년회가 해체 되고 그것을
>'조선축구단'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 최초의 클럽 축구단임으로 축구역사에서 중요한 기록이 된다.
>그러니까 불교와 연관은 있지만 축구단 명칭에서 불교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부터 지적한다.
만불신문 2002년 8월 24일자 신문을 보시면
"....이번 남북친선축구대회를 앞두고 한국축구의 모태가 일제강점기 당시
맹활약한 ‘불교축구단’이란 사실이 입소문을 통해 퍼지고 있어 불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당시 ‘불교축구단’은 일본 본토에 건너가 일본축구를 대파하고 돌아온 조선축구단의
전신인 태고사(현 조계사)의 불교축구단과 관동지역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맹위를
떨쳤던 건봉사축구단이 있었다..."
"...《한국축구 1백년사》에 따르면 불교축구단은 1910년대 후반 당시 태고사
불교청년회원들의 심신수련과 사기진작을 위해 창단됐다고 알려지고 있다.
불교축구단은 운영난으로 해체 위기를 맞았으나 호남의 부호 백명곤 씨의 도움으로
조선축구단을 발족시켰다..."
즉, 조선불교축구단은 조선축구단의 전신이며 두 축구단은 서로 다른 단체로 보이며
불교축구단의 창단은1910년대 후반으로 송옹의 기억과 일치함을 알수 있습니다.
>이 축구단은 1925년 부터 1935년 까지 활동했다.
>1893년(호적상1896년)생인 송덕기의 연령을 계산하여 이 축구단과 대입해 보면
>
>1925년 이면 송덕기 나이는 32살이다.
>23세부터 26세 까지 3년 간 선수를 했다면
>1916년에서 1919년 까지가 된다.
>(이하 생략)
평양축구단의 창설년도는 제 능력부족으로 찾지 못했습니다만, 우선, 송옹께서
평양축구단과 시합을 하신 시합 이름이 과연 <경평축구경기>인지부터 확실하지
않습니다. 글쓴이의 속단으로 생각됩니다.
또 1920년대 초반부터 축구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1910년대 후반
평양에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있지도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만..
아울러 1919년 무렵에 축구를 그만두신분께서 1920년대에 중반에 열린 축구대회
에 참가한 기록이 없으므로 축구선수경력이 맞는 것인지를 묻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상 짧은 소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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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다시 글을 읽어보니 제대로 정리가 된 것 같지 않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비번을 잊어버려서;;)
1.군대해산 이후 소규모 부대가 존재했으므로 군대에 입대한 사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2.불교축구단과 조선축구단을 동일시하시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불교축구단>은1910년대 후반 창설되었으며 운영난으로 해체위기를 맞았다가 1925년 <조선축구단>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3. 조선축구단 소속이 아니시므로1926년 일본축구에 참가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합니다.
4. 평양축구단과의 시합이 경평축구전이라고 "속단" 할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 시합을 경평축구전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근거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5. 다만 그무렵엔 당연히 평양에도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축구단을 "평양축구단"이라고 말씀하신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됩니다.
(X) 2008-09-21
(23:18:04)
고등학생 마지막으로 광야에서님과 다른 분들께서 원본글 및 댓글에서 말씀하시고 싶은 내용은 이것이라 생각됩니다: 송덕기옹의 기억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근대사의 자료들과 비교해가며 검증해야한다. 송옹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면, 도기현 회장이 송옹으로부터 들은 택견/송옹 관련 사실에도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히 동감하고 되짚어 봐야할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검증을 시도하려 할때는 그 비판 자료들도 꼼꼼이 따져보고 정확한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원본글에 달린 댓글들처럼 다른 회원들간의 감정만 상하게 만드는 소모적 글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분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더불어, 제가 제시한 자료들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그부분에 새로운 반박자료를 달아주신다면, 달게 비판 받아들이겠습니다. (X) 2008-09-21
(23:25:38)
대학생 고등학생의 글 치고는 잘썼소. 조선보병대 경력은 문제가 안될 것 같다는데 동의하며, 축구경력문제인데, 평양축구단과의 경기라는 기록을 경평전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일리가 있고요, 또 불교축구단과 조선축구단이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될 만하네요. 우선 도기현,이용복 두 분의 기록이 어떤 객관적 근거에 의한 게 아니라 송옹의 구술에 의한 점이기 때문에 착오가 있을 수 있겠죠. 개인의 기억은 항상 유동성이 있으니까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생각한다면 불교축구단이 1900년대 후반에 생겼다면 송옹이 군 제대후 1915~6년도에 축구단에 가입했다는 기록과 다른 점이 있죠. <1910년대 중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불교축구단과 태고사(조계사)불교청년회가 동일한 것으로 볼수 있지 않겠나요?
다음에 태고사 청년회원들의 심신수련과 사기진작을 위해 창단됐다고 하는 선수단이 선수에게 쌀 10가마가 넘는 월급을 주었을까요?<요새로 치면 조기 축구회 개념인데?>
17세때 결혼하시고 곧 군에 입대하셨다고 했는데 아마 1908년쯤이아라고 했고 1915년까지 군에 계셨다고 했는데요. 송옹이 17세면 1910년이 아닌가요? 1908~1015년이면 무려 7년간 복무했다는 거지요? 수정해서 1910~1915년으로 쳐도 5년이나 되네요. <23세~26세로 3년이라고 했고,이용복의 기록에도 군복무를 3년이라고 했죠?>
거꾸로 역산해서 20세인 1913년에 군입대를 했는데 궁술을 시작한 연도도 1913년이라고 했죠. (X) 2008-09-22
(01:47:32)
대학생 송옹이 축구단에 가입한 그해1916년 부터 따져서 불교축구단(태고사불교청년회)이 해체되고 조선축구단이 1925년에 창단되었다면 10년 정도의 역사가 깊은 축구단이군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고.
1921년 제 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 나라 최초의 축구인 조직인 '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는 기사를 보면 1916년에 거액의 월급을 받는 축구선수가 있었다고 생갹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선수 활동시기를 추구경기가 틀을 갖추기 시작하고, 불교축구단 말기가 되는 1922~25년 정도가 타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선불교축구단>이라고 하였음으로 <불교축구단>인지,<조선축구단>인지도 불명확하다. 아마 조선축구단이 맞는데 전신이 불교축구단이었으니 불교를 넣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X) 2008-09-22
(02:21:08)
고등학생 일단 1908년에 군입대 얘기는 제 계산 실수입니다. 1893년도에 출생하셨고 17세 무렵에 입대하셨으니 1910년쯤이 되겠군요. 도기현 회장님의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23세때 제대하셨다고 했습니다.그럼 6년간 복무하신게 맞지요? 23세때 군 제대하셨다고 했으니 1916년 제대하셨을 거구요.
또 도기현 회장님의 글에는 언제부터 축구를 하셨는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학생님께서 송옹은 1916년 무렵에 축구단에 가입하셨다고 한 말씀은 속단입니다. 다음으로 제 글을 다시한번 읽어보시면 불교축구단은 190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10년대 후반즈음에 창설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X) 2008-09-22
(13:41:21)
고등학생 그리고 불교축구회가 어떻게 그런 거액을 지불할수 있었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1910년대의 축구사는 인터넷으로 찾기에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기에요. 다만 송옹의 축구 경력중 평양축구단과의 경기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는 점, 불교축구단의 창설연대와 송옹이 선수활동을 그만 두실 무렵
연대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 등에서 송옹께서 축구단에 가입하셔서본격적인 선수활동을 하신 시기는 매우 짧았고 이부분이 힌트가 되지는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조선축구단이 맞는데 전신이 불교축구단이었으니 불교를 넣은 게 아닐까...> 하셨는데 제 생각은 오히려 다릅니다.
이용복 총사님 저 "한국무예 택견"에는 분명히 <불교축구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불교축구단이었는데 훗날 조선축구단이 유명세를 타니까, 더군다나 당시에 <조선>자를 앞에 붙이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으니까 <조선>을 앞에 붙이신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X) 2008-09-22
(13:55:56)
짜앙 고등학생이 멀 안다고 지꺼려 결택빠돌이시키 (X) 2008-09-22
(14:57:05)
고등학생 ㅋㅋㅋㅋ (X) 2008-09-22
(17:16:24)
고등학생 생각해보니, 글에 나와 있는 문맥만으로 불교축구회를 단순히 현대의 조기축구회 개념이라 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감히 상상해보건대, 태고사, 현 조계사이고 당시에도 큰 세력인 조계종의 본사라는 점과 운영난에 처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송옹께서 활동하셨던 축구단의 초기때는 월급이 많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제 개인적인 추측이니 반론의 여지가 크다는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X) 2008-09-22
(17:25:17)
고등학생 1921년에 전 조선대회가 열렸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전 단계인 1910년대 후반에는 축구단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상당한 수의 축구단이 있었고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틀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1921년 이후 갑자기 틀이 잡히고 여러 축구단들이 창단되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이런 상황적 배경이 토대가 되어 1920년대에 근대적인 장비와 룰을 갖춘 축구가 등장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리라 봅니다. (X)